인천 구도심 답사 1 -경인선의 성냥공장

in hive-150243 •  2 months ago 

학교 동기들과 인천 일대를 누비는 답사를 다녀왔다. <강남의 탄생>의 저자 한종수가 이끄는 답사 모임이다. 길눈이 수염 잘린 고양이 같이 어두운 처지로 어느 지역에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는 알고 있더라도 그걸 안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를 잘 안다. 하지만 이 답사 모임에 끼면 최단 시간 안에 소화할 수 없을 정도의 볼거리와 사연들을 접하게 된다. 보고 듣는 것도 많을뿐더러 스스로도 “아 이곳이었구나” 무릎을 치게 될 때가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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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도원역 5번 출구였다. 집합장소에 모이자마자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첫 목적지는 대로변에 덩그러니 놓인 돌덩이 하나. 하지만 그 돌덩이는 서울에서 그곳까지 나를 이동시켜 준 철로의 출발을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한국철도최초기공지비(韓國鐵道最初起工址碑)다. 원래 철로의 첫 삽을 떴던 곳은 이곳이 아니고 비석 뒤로 올려다보이는 언덕 우각현(쇠뿔고개)이었다. 그곳에는 의사이자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자 돈에 환장한 ‘돈귀신’이었던 알렌의 별장이 있었다. 이 별장이 소실된 뒤 저 유명한 신앙촌의 교주 박태선이 땅을 사들여 지은 전도관이 눈앞에 드러난다. 미국 사업가가 미국 공사 별장 근처에서 첫삽을 뜬 경인선 사업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갔고 1899년 9월18일 마침내 개통식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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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교가 채 지어지지 않아 아직 진정한 ‘서울’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건 거창한 개통식이 이루어진다. 경인철도합자회사 사장이었던 시부자와 에이치는 낭랑한 일본어로 이렇게 연설한다. “철도는 황야를 개척하고 물산을 증식하고 공예를 일으키고 상업을 통하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 대한국과 같이 대륙의 일단을 점하여 해양에 돌출하고 토양이 기름지고 바다와 육지의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정재정, <일본의 대한침략정책과 경인철도 부설권의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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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고 온 경인선에 그런 사연이 깃들어 있음을 표지석은 묵묵히 전한다. 아울러 인천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복잡하면서 서글프고 흥미로우면서 씁쓸한지도. 표지석을 떠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창영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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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된 이 학교 건물은 무려 1924년 3월에 준공된 것이다. 현관과 1층 창문은 반원 아치형이고 2층 창문은 수평 아치형으로 마무리된 초기 근대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학교 건물을 좀 들여다보려고 우루루 들어갔다가 코로나 정국의 엄준함을 깨닫고 쫓겨난 뒤 이 학교가 자랑하는 인물들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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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강재구 소령. 월남 파병이 예정돼 있던 맹호부대 소속 대위였던 그는 훈련중 휘하 병사가 수류탄을 떨어뜨리자 그 위에 엎어져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했다. 한종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른바 살신성인의 대명사로서 7~80년대 내내 호명됐던 그의 흉상이 학교 안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한국 미술사학계의 대부라 할 고유섭,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아 참 무엇보다 메이저리거 류현진이 이 학교 야구부 출신이기도 하다. 이 학교 야구부는 인천 야구의 전설 박현식과 임호균을 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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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등학교와 맞닿은 영화초등학교도 인천의 역사를 담고 있다. 미국 여성 마거릿 벤젤은 1891년 22세 때 평양에서 인천으로 건너와 당시 내리교회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르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1909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10년 오늘날 자리에 2층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전했으니 무려 1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학교인 셈. 인천에는 ‘한국 최초’가 참 많은데 이 영화초등학교 출신자들도 그 타이틀을 많이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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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박사이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가 여기 출신이고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여기 출신이다. 이 명단을 읽다가 동기 남자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이화여대 사범대학장 김애마” 이름 앞에서다. 고명하신 교수님께는 송구스런 일이나 ‘애마’ 이름에서 그만 35년쯤 전의 청소년 시절 뭇 중고딩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애마부인’의 추억이 떠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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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애마부인의 ‘마’가 무슨 마인지 아냐?”

“말 마(馬)지 당연히. 말 타고 달리는 장면 있잖아.... 그 가슴 출렁거리.... 읍읍”

“아니야 삼 마(麻)자야 포스터에 그렇게 나와 있어. 검열 당국이 말 마(馬)는 너무 선정적이라고 바꾸라고 그래서 그렇게 됐어.”

“뭐야? 아니 그럼 대마초 마 자 아니야. 더 선정적인데?”

“됐고...... 애마부인이 몇 편까지 나온 줄 아냐?”

“내가 13편까지 본 기억이 나는데....... ”

“새끼.... 많이도 봤다. 영화 강의하는 동기 광우가 그러는데 15편까지 나왔단다.”

“우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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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마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걸음 하나는 축지법 쓰는 것 같이 빨리 걷는 리더 종수를 따라 다다른 곳은 성냥박물관이었다. 안타깝게도 성냥박물관은 코로나 때문에 관람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종수의 설명.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김옥균이 가장 신기해 했던 게 바로 이 성냥이라고 해. 아궁이에서 불씨 꺼뜨리면 거의 죽음에 가깝게 혼나던 게 조선 시대 아니냐. 그런데 탁 긁으면 불길이 이는 성냥은 그야말로 마법의 불 같았겠지. 김옥균이 야 이거 개화해야겠구나 결심을 굳히게 만든 데에는 이 성냥이 한 30% 역할은 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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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당시 우정국에서 거사를 일으킨 뒤 무장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찾아온 김옥균은 왕과 왕비에게 넓은 창덕궁을 떠나 수비가 쉬운 경우궁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때 민비는 야무지게 김옥균을 다그치며 대체 누가 일으킨 변란인지를 따지는데 이때 천둥같은 폭음이 울렸고 이에 기가 질린 왕과 왕비는 김옥균을 따르게 됐다. 많은 장사들이 폭탄을 터뜨려 거사에 호응하기로 했는데 궐 안의 궁녀 고대수가 유일하게 이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김옥균과 아삼육이었던 고대수는 김옥균으로부터 성냥을 건네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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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이후 인천은 이 성냥의 주산지가 된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배후로 두고, 성냥의 재료가 들어오기 편리한 항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917년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는 그 대표적 기업이었다. 인촌(燐寸)은 성냥이다. 성냥개비로 쓸 목재는 백두산 소나무였다. 압록강까지 뗏목에 실려온 목재는 신의주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경성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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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 손길이 필요해서 그랬는지 성냥공장의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들은 무려 13시간에 가까운 노동 시간, 1만개가 넘는 성냥을 성냥곽에 담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급여는 소태보다도 짰다. 퇴근 시간에는 혹여 성냥을 빼돌리는 일이 없나 살피는 감독관들이 눈을 부라렸고 손버릇 나쁜 놈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몸을 더듬는 일도 흔했다. 이런 슬픈 사연으로부터 나온 속요(俗謠)가 “성냥 공장 아가씨”다. 80년대 술자리에서 흔히 불려지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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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성냥 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갑 두 갑 일년에 삼백육십오.

치마 밑에 감추고서 공장 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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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몰랐다. 이 노래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었는지. 함께 간 여자 동기들에게 가르쳐줄 수 조차 없는 음담패설 가사에 사실은 얼마나 깊은 한이 맺혀 있었는지. 이 한을 곱씹던 인천 성냥 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1921년 악덕 감독관의 교체를 요구하면서 인천 지역 최초의 동맹 파업을 일으켰고 이후로도 수시로 노동 쟁의를 일으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했다. 안데르센의 나라에 성냥팔이 소녀가 있었다면 우리나라 인천에는 성냥만드는 소녀들이 있었다. 하루에 만 개씩의 성냥을 성냥곽에 담으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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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인의 시 <성냥공장 아가씨>를 읊조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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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성냥개비만 밀려온다

한 달 내 성냥갑이 그녀 앞으로 흘러오고 흘러간다

퇴근길 쇼윈도엔 꿈같은 드레스가 걸려 있는데

그녀에겐 병든 엄마가 있다

월급봉투만 채 가는 주정뱅이 아빠도 있다

인천에도 성냥 공장이 성냥 공장 아가씨가 있었다

군인들은 낄낄대며 노래했었다

인천에 성냥 공장 아가씨는=

하루에 한 갑 두 갑 치마 밑에 감추다

치마에 불이 붙어 방화범이 됐다고

성냥 공장 아가씨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도 춤추자고 아무도 이쁘다고 하지 않는다

성냥갑 속에 성냥알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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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쓰디쓴 것이고 역사는 냉정하게 흘러가지만 또 그렇다고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렇게 팍팍하기만 하랴. 가끔은 판타지에도 젖고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는 기쁨도 누려야 인생이다. 다음 목적지에서 일행은 저마다 환상에 젖게 된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현장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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