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2일 라스코 동굴 벽화와 이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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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2일 라스코 동굴 벽화와 이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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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되고 북 프랑스는 독일이 직접, 1/3 정도의 남부 프랑스는 비시 괴뢰 정부가 다스릴 무렵 프랑스 중부 몽타냑이라는 마을의 4명의 악동들이 반란(?)을 꾀한다. 레지스탕스 같은 건 아니었고 학교를 ‘째고’ 다른 데로 ‘샐’ 계획을 세운 것이다. 1940년 9월 12일 목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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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로 신나게 쏘다니던 그들은 동네 라스코 언덕을 줄달음치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폭풍우에 넘어진 나무 근처 땅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본 것이다. (데리고 다니던 개가 구멍을 향해 짖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마을에는 근처에 있던 중세의 고성(古城)으로 통하는 비밀 지하 통로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던 바 이는 아이들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열 너덧 때 모험심(?)은 가끔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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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소년들은 구덩이 입구를 넓히기 시작했다. 구덩이는 어두운 터널로 연결됐다. “맞다! 진짜 지하통로다! ” 갑자기 중세 기사의 갑주 입은 해골이라도 발견할 듯 흥분한 아이들은 서둘러 하지만 조심스레 지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선봉은 나이가 제일 많은 마르셀이라는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기다시피 했지만 차차 동굴은 넓어졌다. 네 명 다 일어서서 사방을 살필 만한 공간에 이르렀을 때 소년들은 주변을 플래쉬로 훑었다. 그러던 네 명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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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천정과 벽에는 화려한 그림들이 그득했다. 무려 2000점에 가까운 벽화와 암각화들이었다. 말 · 곰 · 사슴 · 들소 · 노루 · 매머드 등 100여 마리의 동물들을 사냥하는 모습,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는 사람들, 활기차게 뛰노는 동물들의 풍경, 심지어 황소에 받혀 자빠진 사람의 모습까지도 컬러풀하고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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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만 7천년 전 구석기인들의 작품이었다. 인류의 미술은 투박하고 단순한 형태에서 문명이 발전하면서 복잡 세련된 것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 당시 통념이었지만 라스코 동굴 벽화는 그 자체로 후손들에게 “웃기지 마.”라고 비웃는 듯 했다. 피카소도 와서 보고 두 손을 들었다. “현대미술이라고 나아진 게 별로 없다. 그들은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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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인들에게 무슨 문화가 있었겠냐는 허튼 생각은 이 벽화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동굴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그 ‘원시인’들은 망간 또는 목탄을이용해 밑그림을 그렸고, 산화된 철에서 붉은색이나 노란색을 얻었으며 물의 뼈나 식물을 태워 그 재로 검은색을 구해 벽화를 그렸다. 그 지혜(?)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 그만큼 다년간의 경험과 전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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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기법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다. 명암으로 원근감을 표현했는가 하면, 동굴 벽면이나 천장의 울퉁불퉁한 면을 이용해 동물들의 입체감을 구현해 놓은 것도 있다. 또 동물의 움직임을 마치 활동사진처럼 여러 장면의 컷으로 겹쳐 놓듯이 묘사해 놓은 작품도 발견되었다. 가장 뛰어난 점은 동물마다 특유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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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10대학의 최근 연구결과는 더욱 놀랍다. 라스코 동굴벽화처럼 선사시대에 그려진 동굴 벽화들의 대부분이 그 동굴 안에서 목소리가 가장 똑똑하고 크게 들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즉 최상의 반향 효과가 나는 지점을 구석기인들도 알고 벽화를 그렸다는 말이 된다. 심지어는 일부 동굴의 반향효과 극대 지점에서 소리를 내면 부근 벽에 그려진 동물의 소리와 매우 비슷한 소리가 나기까지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이언스타임즈 2016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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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 제대로 된 발굴은 어려웠고 전쟁이 끝나고서야 개방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예술과 문화를 아낀다는 프랑스인들이 간혹 드러내는 속물근성이 발동했다. 동굴의 보존보다는 관광객의 주머니에 더 주안점을 둔 개방이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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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기를 가설하고 굴을 파헤쳐 통로와 계단 등이 설치됐고 구름같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이산화탄소를 마음껏 내뿜었다. 1만 5천년 동안 고이 간직돼 온 그림들이 부식되고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났다! 프랑스 정부는 부랴부랴 1963년 동굴을 폐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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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인류의 보고(寶庫)를 생으로 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매우 예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초일류 사진사와 화가들을 동원해 라스코 동굴 복사판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난한 작업 끝에 라스코 시즌 2(?)가 1983년 문을 열게 됐고 오늘날 가서 볼 수 있는 건 이 정교한 복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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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특이한 동양인의 이름도 있다. 이희세(1932~2016)라는 화가다. 충남 예산 출신이다. 충남 예산에서 자란 사람으로 (출생지는 홍성) 이씨에 프랑스 화가라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암 이응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이지만 동백림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그 사람. 이희세는 그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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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미대 동양화과를 나와 학교 선생을 하던 이희세는 숙부 이응로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숙부의 지도 하에 작품활동을 하며 가족들을 프랑스로 부를 꿈에 부풀어 있던 그였다. 1967년 어느 날 숙부가 한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는 말을 전한다. 우리 예술혼을 세계에 떨친 분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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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갔는데 초대된 곳은 청와대가 아니라 교도소였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북에 있던 아들을 만나고 싶어했던 이응로 화백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두어 번 찾았던 게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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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는 동양화가로 활동하던 이희세의 인생도 롤러코스트를 타게 된다. 이응로 구출 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역시 한국 정부에게 찍힌 ‘반한(反韓) 인사가 됐고 한국에 남은 가족들의 발은 꽁꽁 묶여 버렸다. 그는 돌아올 수 없었고, 가족들은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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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출국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그의 부인과 남매는 당국에 여권을 빼앗겨 프랑스로 올 수 없었다. 프랑스로 떠나올 때 3살이던 아들은 9살 무렵 어렵사리 프랑스로 데려왔지만, 생후 10개월이던 딸은 지난 89년 1월 이(응로) 화백이 숨진 뒤 묘소 참배를 위해 가족들이 프랑스를 방문하기 전까지 27년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의 부인은 이미 세상을 등진 뒤였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16일) 이 무슨 발견 이전의 라스코 동굴 같은 어둠의 세월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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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라스코 동굴 벽화 그림을 모사하는 그 인류사적인 순간에도, 그는 화가이면서 투사가 돼야 했다. 라스코 벽화를 그리던 그 즈음 그는 ‘한국 자주 통일 추진회’를 결성한 통일운동가였다. 그가 문을 연 ’김치식당‘은 유럽 민주화운동 세력의 사랑방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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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그 제목은 ’코리안 돈키호테‘다. 제목을 지은 배경이야 알 수 없으나 20대 젊은 감독 눈에는 그의 ’조국 통일‘에 대한 견결한 어찌 보면 갑갑한 꿈과 실천이 돈키호테처럼 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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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외국에서 통일운동한다는 분들의 상태를 보면 과히 좋지 않다. “진짜 주사파는 미국에 있다.”는 말처럼 한국 주사파는 댈 것도 아닌 수령님 만세를 거침없이 외치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있고 유럽 쪽 통일운동하는 분들도 6~70년대의 시선으로 21세기의 남과 북을 바라보는 경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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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1960년대 야만적이었던 남한 정부였다. 상황이 다르고 형편이 판이한 유럽에서 북한인들과 조우하고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국제적 명성이 있는 예술가들을 사기쳐서 끌어들여 족쳤던 정부를 경험한 이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민주화됐다고 해도 ‘서약서’나 반성문을 요구하면서 안내면 못들어온다고 뻗대던 남한 정부를 그들이 어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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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류의 보물을 발견해 놓고 관광객의 호주머니에 눈이 어두워, 또는 별 생각 없이 라스코 동굴에 전깃불 밝히고 계단 놓고 동굴 파헤친 프랑스 정부는 그를 처절하게 반성이라도 했고 그들이 가동할 수 있는 예술적 자산들을 총동원하여, 이희세 같은 외국인까지 끌어들여 라스코의 복사판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그 죄를 씻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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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남한은 우리가 저질렀던 야만에 대해서 어떤 반성을 하고 있으며 야만의 피해자들에 대해 어떤 대접을 하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다짐의 반의 반이라도 하고 있을까. 윤이상이든 이응로든 우리는 우리의 라스코를 묻어 버렸다. 그냥 . 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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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